북부여, 동부여



뭐 소설을 쓴다면 한정없겠다만 지금 학계의 부여설도 굉장히 자의적인 해석이 많아 거의 소설책 수준이니 에레메스 님 말마따나 나라고 해서 못쓸 이유는 없겠다.... (뭐야. 임마?)


에레메스 님의 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여 지도들이다. 조금 틀릴 수 있으나 짱구를 굴려 나름대로 만들어 본 것이다.

부여의 동명왕이란 작자가 세웠을 때의 부여의 모습이다. 아직 북, 동부여 분열 이전이다.

신화에 따르면 천제가 부여 재상 아란불보고 나라를 동쪽 바다의 가섭원으로 옮기라고 해서 해부루 왕이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여에 변고가 일어나 어쩔 수 없이 옮겼을 것이다. 이 때 해모수 집단의 북부여, 가섭원 중심의 동부여로 분열되었다. 동부여의 위치는 아주 옛날 고릿짝 시절 학설대로 두만강 지역이라기보단 한카 호 지역이 유력하다. 물론 이 지역의 유적, 유물 출토 현황은 아직 알 수 없다. 이후 금와가 왕이 되고 대소 태자와 이외의 여러 왕자들의 등쌀에 떠밀려 주몽이 졸본으로 피신하고 고구려가 세워진다.

에레메스 님은 대소왕의 즉위를 전후로 양(兩) 부여가 통합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 비록 해부루가 해모수 집단의 반란에 떠밀려 천도하긴 했지만 얼마 가지않아 북, 동부여가 통합되지 않았는가 싶다. 광개토왕 비문을 볼 때 주몽을 북부여 출자로 보고 있으며 이외에도 북부여 출자로 보는 기록이 있다. 이를 사실로 인정할 때 주몽은 북부여인이 된다. 또한 주몽이 동부여 왕실의 엄청난 정치적인 공격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가정해 볼 때 주몽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원래 북부여였으나 북부여가 망하고 난 뒤 동부여로 흡수된 세력이 아닐까? 그래서 결국 동부여 왕실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없어져야 할 주몽도 알아서 사라져 주셨고 주몽이 만든 고구려도 알아서 기어 조공을 바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자 만주 지역(편의상 이렇게 부르자.)에 평화가 찾아 왔다. 그러나 이 정치적인 안정은 안정이 아니었다. 부여에는 대소왕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몇몇은 고구려로 망명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 땜시 뒷골이 땡긴 대소왕은 드디어 가장 만만한 외번(?) 고구려를 손봐주기로 하신다. 당시 대소왕이 유리왕에게 보낸 조서는 고구려가 볼 때 매우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천조국 성님(?)들과 맞장을 뜰 힘이 없던 고구려는 알아서 기어 볼모를 보내려고 하지만 태자 도절이 땡깡을 부려 안보내게 된다. 결국 대소왕은 고구려를 수차례 공격하게 되지만 하늘이 고구려 편이었던 모양인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다.
주몽도 죽었는데 이 나이 쯤이면 백발의 할아버지나 다름 없을 대소왕도 정력 하나는 갑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전쟁을 해대니 부여의 국력 소모도 엄청났을 것이다. 이 기회로 무신(武神) 중 무신이라는 대무신이라 불렸던 사나이 대주류왕은 고구려의 왕이 되자 부여를 공격하게 된다. 대소왕은 애송이 고구려군을 기마병으로 밟아주려고 했지만 그만 인솔 기마병들이 진흙탕에 빠져 군사들의 대오가 흐트러지게 된다. 이 기회로 고구려 장수 괴유가 대소왕의 목을 베었지만 이것은 부여 군사들의 뒷골을 당기게 하는 효과를 만들고 말았다.
결국 고구려군 처참히 처발린 후 본국으로 퇴각.
그러나 이후 부여는 엄청난 정치적인 혼란을 겪게 되었다. 대소왕의 동생은 부여를 떠나 갈사국을 세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1만명의 거느리고 고구려에 항복해 버린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가 얼마 안되는 것을 감안하면 1만 명이 투항한 것은 고구려에게 엄청난 이득인 것이다.
이 시기 통합되었던 북, 동부여가 다시 분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막래왕이 부여를 접수했다고 하는데 이 막래왕은 고구려의 4대왕이다. 그렇다면 막래왕이 민중왕인가? 하지만 민중왕은 너무 재위기간이 짧았고 왕이라기보단 거의 섭정에 가까워 거의 왕으로도 인식하지도 않았던 듯 하다. 그렇다면 막래왕은 모본왕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통설에서는 막래왕이 대주류왕이라고 하지만 둘의 행적은 부여 정벌 기록 빼고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막래는 여율왕의 아들이지만 민중왕은 대주류왕의 동생이다. 이렇게 볼 때 막래는 모본왕으로 비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모본왕 때 망한 부여는 동부여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도 한나라 기준에서 외교적 거리는 동부여보단 북부여가 더 가깝다. 그리고 한카 호 지역의 동부여가 한나라 현도군과 통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이 때 망한 부여는 동부여가 적합하다.
또한 삼국지 기록 대로 부유하여 선세 이래 한번도 외침으로 파괴된 적이 없었던 부여는 동부여보다는 북부여가 더 어울려 보인다.

이후 재건된 부여는 겁나게 강력한 세력이 된다. 이 녀석들은 워낙 고구려가 짜증났던 모양인지 고구려가 요동군, 현도군을 공격만 하면 방해하거나 고구려의 적국을 지원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북부여의 왕이 직접 한나라를 방문할 정도로 한나라와 가까이 지내면서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괴롭혀 댔다.
태조왕 시기 부여 때문에 군사 작전이 허사로 돌아간 사례가 많다. 그만큼 부여와 고구려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이 시기에도 태조왕은 동부여 지역으로 유화의 묘에 계속 참배를 했다. 그리고 동부여는 고구려에 조공을 했다.
대소왕의 사후 북부여와 동부여는 이렇듯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태그 : 부여사
덧글
494년에 망한 나라는 북부여가 아니라 서부여입니다.
북부여와 고구려는 다른 나라가 아닙니다.
북부여의 7대 왕 고주몽이 나라이름을 고구려로 바꾼겁니다.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주위의 질투로 인해 20살쯤에 졸본부여로 가서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의 자리를 물려받은거죠.
그당시 북부여가 졸본부여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습니다.
고주몽은 북부여 7대 왕이자 졸본부여 3대 왕이자 고구려 1대 완인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