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는 이 때 겁나게 강해져서 전한 때부터 신속했던 읍루로부터 지속해서 조공을 받았다. 하지만 부여의 조공 요구가 너무 지나쳤던 모양인지 급기야 읍루인들이 고구려 산상왕 시기(삼국지 동이전 원문에는 황초 연간으로 되어 있으며 이 시기는 기원 후 220~226년.)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뿔난 부여가 몇 차례 토벌했으나 이 놈들이 험한 산속에서 거주하면서 히트 앤드 런을 때리니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하여간 북부여의 병크짓으로 인해 결국 큰 타격을 입는 지역은 북옥저 지역이었다. 읍루족은 툭하면 배타고 내려와 북옥저를 약탈해 갔다. 게다가 북옥저는 이미 주몽의 장수 부위염에게 복속된 이후로 계속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야 했던 처지였다. 고구려에 조공 바치랴, 읍루족 침입 막으랴해서 나라가 크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산상왕 시기 고구려가 이 지역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산상왕은 초기의 반란 사태로 인해 복구하는 작업을 해야 했고 이외에 신경 쓸 것이 많아 이 지역을 관리할 틈이 없었다.
어쨌든 북부여는 이 때 돈줄(?) 하나를 잃어 국력이 약화되었다. 현도군과 요동군도 태조왕 시기 고구려에게 몇번 작살이 났고 북방 민족을 신경쓰느라 북부여의 지원군이 되어 줄 형편도 못되었다.
다행히 동천왕 시기 고구려가 조위에 의해 크게 털리게 되자 이 때 부여는 조위를 지원하게 된다. 이 때 고구려는 정말 개털렸다. 조위의 군대에는 선비, 낙랑, 대방 등 여러 곳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있었고 게다가 부여가 보급을 해주었으니 고구려가 관광 안 당할 수가 있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여의 사정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기원 후 285년에 선비족 모용외의 침공으로 부여는 완전히 거지꼴이 되고 말았다. 이 때 부여인들은 대거 노예로 팔려가 시장에서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부여왕 의려는 이 때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북옥저로 도망갔다. 하지만 서진의 도움으로 북부여가 다시 재건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고구려는 숙신을 공략하여 부여 지역 오천으로 숙신 주민 600호를 사민시키고 여러 부락의 항복을 받았다. 개털렸던 고구려가 다시 국력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희대의 폭군 봉상왕의 병크짓으로 인해 모용 선비족의 침략을 받고 엄청난 국력 손실이 있었으나, 국상 창조리가 그를 몰아낸 후 미천왕이 즉위하자 고구려의 국세가 다시 회복되었다.
미천왕 시기 서안평을 점령하고 현도군을 공격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서 축출시키는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요동 지역의 군벌 최리의 요청으로 단 선비와 우문 선비와 함께 협공할 정도로 국세가 커졌다.

하지만 이 협공 작전의 실패로 요동 지역이 모용 선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이후 고구려는 수세에 처한다. 모용황 때는 더욱 수세에 몰려서 미천왕의 묘가 파헤쳐지고 태후와 왕후가 끌려가는 변을 당한다. 게다가 전연에 엄청난 세폐를 바쳐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연이 망하자 이런 상황은 그래도 나아졌다. 하지만 남방전선에서 백제에 의해 대패하여 대방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조위와 전연에 의해 연달아 고구려가 참패를 당하고 고구려의 대외 정책이 서방으로 집중되자, 동부여 지역에서는 점차 독립적인 세력이 구축되었고 이후 광개토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세는 소수림왕의 대내적인 개혁 이후 급속도로 회복되었고 적어도 광개토왕 이전 시기에는 북부여가 고구려에 의해 복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북부여는 고구려 영역의 일부로 재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광개토왕 시기 벼슬아치였던 모두루가 북부여 수사로 북부여 군(郡)에 부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그 : 부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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