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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메스 님의 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여사 -完- 삼국 시대


다음 글은 고구려 중심의 글로 보일 수 있으니 이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읍루족 병크짓으로 인해 국세가 기울던 북부여는 점차 선비족에게 두차례 엄청나게 털리고 난 뒤 약화되었다가 고구려에 의해 복속되었다. 일부 세력들은 니하를 건너 두막루를 건국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일단 통설대로 470년 전후는 아니다. 470년에 두막루가 북위에 조빙한 기록을 근거로 그렇게 추정하는데 백제도 건국한지 약 300년이 지나서 근초고왕 시기 중국 왕조에 조빙을 했다. 이것을 감안하면 조빙 기록을 두고 두막루의 건국 시기를 추정할 수는 없다. 

에레메스 님의 견해를 따라 적어도 북부여가 광개토왕 즉위 이전에 멸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와 근접한 시기에 두막루가 건국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고구려는 진짜 잘나가고 있었다. 이 때 왕이었던 고국양왕은 요동 지역이 공백이었던 틈을 타 요동성과 현도성을 먹어버렸다. 태왕사신기와 광개토태왕이란 드라마에서는 고국양왕을 아주 볍신으로 만들었지만. 엠병크과 캐빙신을 죽입시다.

이 때 고구려는 후연과 요동을 두고 공방전을 계속 벌이고 있었다.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계속 연출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모조리 상실한 대방 지역을 두고 백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상황은 광개토왕 때까지 지속되었지만 그의 재위 중반기에는 거의 정리가 되었다. 

광개토왕 때 고구려는 정말 절정이었다. 다음 지도를 보면 그 위력을 실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백제를 공격하여 대방 지역을 탈환했고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압박했다. 또한 거란을 침공해서 백성을 돌려받고 엄청난 수의 거란 부락을 소탕(파괴)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전리품(약탈물)을 챙겼다. 그 뿐이 아니라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백제왕의 항복을 받았고 10명의 주요 대신들과 백제왕의 아우(정황상 부여홍일 가능성이 높다.)를 볼모로 잡아갔다. 게다가 당시 숙신 지역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일부 부족들은 광개토왕의 동북부 순행 때 토벌되었다.

또한 신라의 구원 요청으로 왜를 섬멸하고 남방의 판세를 완전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이후 광개토왕은 요동 지역에서 패권을 장악했으며 요서 지역까지 공략해서 후연을 몰아 붙여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또한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건국되자 종족의 예로 대해줄 것을 약속하여 서방을 안정시켰다. 이외에도 고구려는 남연과 교역하여 물자들을 교환했다. 그리고 백제의 사주로 대방 지역을 침입한 왜를 섬멸하였다. 그리고 조공을 중단했던 동부여를 손봐주고 조공 약조를 다시 받아 내었다.

단기간에 광역의 대외정책을 벌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이 때 반기를 들었던 동부여는 고구려의 번국으로 다시 전락하게 되었다. 예전과 같이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고구려에게 64개 성과 1400여 촌이 함락되는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이 때 부여 지역에 있던 적지 않은 압로들이 고구려로 투항했다. 

결국 동부여는 한번 반기들었다가 고구려에게 제대로 털린 셈이다.


동부여가 재건되는 상황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다. 비록 당시 고구려 주변 상황이 고구려에게 쉬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동부여가 이를 기회로 삼아 부흥할 여지는 없었다. 광개토왕에게 완전히 궤멸당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까 말한대로 광개토왕 사후 고구려의 주변의 정세는 정말 급박하게 돌아갔다. 다음으로 즉위한 장수왕은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국내성 내에도 구귀족들을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망 위기에 처했고 교역국이었던 남연도 410년에 동진에 의해 망하고 난 뒤였으니 남조와 새로운 교역로를 정식적으로 틀 필요가 있었다. 

장수왕은 이에 대해 매우 유연하게 대처했으며 북조와 남조 동시에 화친을 했다. 게다가 백제를 완전히 궤멸시켰고 신라의 북방을 공격했다. 이렇듯 장수왕은 서, 남방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장수왕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동북방의 물길이었다. 이 부분은 장수왕 재위 시기에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였다. 서천왕 때부터 계속 이 지역을 통제해 왔지만 워낙 흩어져 살아 고구려 입장에서는 완전한 통제가 힘들었다. 물길은 북위에 조빙하여 국제 무대에 나설 정도로 주목받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장수왕은 물길이 북위와 화친하지 못하도록 유연과 함께, 북위와 물길의 중간 지점이었던 지두우를 공격했다. 

당시 지두우 공격을 두고 여러 학자들의 설이 많지만 필자는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본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거란 부족민들이 고구려와 유연의 공격을 피해 북위로 피신한 일이 나온다. 요사, 위서, 수서의 거란 기록들을 통해 이런 정황을 알 수 있다. 즉, 지두우가 고구려와 유연에 의해 공격 당할 동안 거란도 덤으로(?) 공격당한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서북방 세계는 결국 교란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물길이 완전히 통제된 것이 아니었다. 지두우를 공격해  그리고 점차 동부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추측해 보건대 그 양상은 과거 읍루가 북옥저를 침공했던 상황과 비슷했을 것이다. 

결국 494년 문자명왕 시기에 동부여는 물길의 압박을 못이겨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투항했다. 

이 때 부여는 완전히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비록 부여는 망했지만 그 이름은 고구려나 백제에 의해 잘도 이용되었다. 동부여의 멸망으로 인해 고구려는 북위에 대고 금이 들어오지 않아 조공할 수 없단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댔다.(그리고 이런 궤변에 제대로 응수하지 못한 북위....ㅜ) 심지어 백제 같은 경우 성왕 때 다시 먹고 살만해지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다. 

또한 부여의 멸망으로 인해 고구려는 아래 지도와 같이 어느 정도 안정된 판도를 구축하게 되었고, 수나라 시기에는 동서 6000리, 남북 8000리에 이르는 대국으로 성장했다. 

(동서 6000리, 남북 8000리에 대한 기록은 통전을 근거로 했다. 송기호 교수는 이에 대해 비판하지만 저자 두우가 당나라 시대 사람이었고 다른 시대에 비해 고구려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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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에레메스 2012/01/10 20:25 # 답글

    잘 봤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 통전에는 동서 6천리라는 기록만 있지, 남북 8천리라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동서 6천리 기록은 통전 말고도 태평환우기에도 있더라고요.^^ 아무쪼록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마에스트로 2012/01/10 20:39 #

    그렇군요. 그 부분은 밑줄 긋겠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1/10 22:06 # 답글

    한반도 중부 이남의 영토 변화가 없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일단 내용의 핵심은 對부여이기 때문에 생략! ^^ ㅋ
  • 마에스트로 2012/01/10 22:09 #

    한반도 중부 이남도 꽤 골치 아픈 동네더군요. 어느 마을에서 자다 일어났다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뀌어 있으니..... 심지어 고구려 요새가 대전까지 내려온 경우도 있던데요? 그래서 일일이 다 알아서 표기하기도 어렵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2/01/10 23:18 #

    ㅋㅋ 네~그래서 제가 생략하고자 했던 겁니다.
    아마 그건 이렇게 지도로 표기하기도 애매해서 말이죠. ^^
    암튼, 지도 만들어서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마에스트로 2012/01/10 23:24 #

    시리즈 완결판의 지도의 사실 한반도 중부 이남의 영토를 자세히 보시면 조금 비쭉비쭉한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나름대로 당시의 깨알같은 정황을 표시하려 했으나 결국 망.......

    하여간 북쪽이나 그나마 만들었네요ㅋ

    감사합니다.ㅋㅋ
  • 제노 2015/02/13 02:21 # 삭제 답글

    동서 6000리 믿을만 한데 남북 8000리 이면 3141km 입니다 신빈성이 부족합니다 충주비석에서 시작했을때 상상도 못할정도 영토 입니다 동서 6000리는 북경에서 블라디보스터 거리상은 맞긴 합니다만
    남북의 직서리 거리인지 면적인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 제노 2015/02/13 02:22 # 삭제 답글

    동서 6000리 믿을만 한데 남북 8000리 이면 3141km 입니다 신빈성이 부족합니다 충주비석에서 시작했을때 상상도 못할정도 영토 입니다 동서 6000리는 북경에서 블라디보스터 거리상은 맞긴 합니다만
    남북의 직서리 거리인지 면적인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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