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전승에 대해서는 필자는 일반적으로 의고학파의 관점대로 전승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승이 모두 거짓이란 것은 아니다. 조선의 핵심 세력이 바뀐 것은 있지 않았나 생각은 든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추측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석고학파의 관점을 가지고 이를 바라보지는 않는다.
고힐강 선생님이 중국 상고사에 대해 '층층이 만들어진 중국 상고사'로 인식했듯이(물론 하상을 부정한 인식은 상의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논파되었지만), 필자 역시 기자 전승을 그렇게 보고 있다.
감히 단언할 수 없으나 기자 전승에 대해서는 "이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란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료적 가치가 의심되는 위략에서 나온 기록이지만, 이 기록이 우선 당시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가정해보자.
조선은 어느 시기부터 주나라 제후국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고 그 흔적은 관자에 남아 있다. 조선의 지도자(연맹체의 대표? 그 실체는 알 수 없다.)는 아마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겠으나, 이 명칭을 제후국 상인들은 '후'란 호칭으로 해석하여 본국에 전했을 것이다. 오, 초, 진 같은 나라들도 오랑캐인 동시에 제후국으로 인식되고 있던 터라 조선도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을까?
아마 당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황에서 비롯된 오해로 인해 조선을 제후국, 혹은 준 제후국으로 인식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조선후가 칭왕을 했을 시기에 존왕양이, 즉 주나라의 왕실을 받든다는 기치 아래, 조선왕이 거병을 했단 소문도 퍼졌을 것이다. 조선의 지도자가 '후'란 칭호를 썼는지, 칭왕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무엇보다 조선왕이 존왕양이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된다. 아마 앞서 말했듯이 중국 동부 연해 지역의 제후 국가들의 조선에 대한 오해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런 오해로 인해 기자 전승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힐강의 중국 전승에 대한 가설들이 고고학적인 자료들이 축적됨에 따라 절반 정도는 논파되었듯이, 본인의 이 가설도 논파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필자는 언제든지 본인의 테제가 실제 역사 사실과 부합되지 않을 경우 수정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단군 부분은 강좌 중국사 1권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을 완전히 소화한 상태에서 쓴 것이 아니고 조금 성급하게 쓴 것이니 양해 바란다. 특히 홍산 문화에 대해서 조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본문 내용은 수정될 수 있으니 이 점 양해 바란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떠한가?
불가피하게 필자는 요하 유역(동, 서요하 모두 포함)의 홍산 문화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홍산 문화의 우하량 유적을 보면 주변 지역의 취락이 보이지 않는 대신, 제사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건축물 유적이 발견된다. 이 건축물은 생계 주거용으로 적합하지 않다. 건축물 주변에 취락 유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족 집회소로 쓰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유적지에는 제의 용도로 쓰였을 법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된다. 그래서 보통 중국 학계에서는 우하량 유적지를 부족 연맹의 성소로 인식한다. 이를 볼 때, 홍산 문화권 부족들은 제의 집행자를 구심점으로 결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원 지역과 달리 홍산 문화권은 제의 당당자들을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흔적이 강하다. 아마 이런 형태가 단군 시대의 조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물론 본인은 홍산 문화 담당자들을 산융, 동호 등 요서 지역 북방 민족들의 먼 조상으로 보고 있다. 북방 민족들은 원래부터 유목을 한 것이 아니었다. 몽골 초원 서부 지대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데 이것은 농경의 흔적으로 인식된다. 아마 신석기 시대 당시 북방 지역도 농경이 가능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초원 지역과 요서 지역이 건조해져 농경이 불가능해지자 이곳 거주민들이 유목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요동 지역이나 한반도 북부 지역의 구체적인 고고학적인 상황은 알 수 없어 소설을 쓰는 것 같으나 필자는 홍산 문화에서 나타난 대로 두 지역에서도 어떤 제사장을 중심으로 부족들이 결집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지역에 관해 고고학적인 상황을 아시는 분은 트랙백을 달아 이 부족한 중생에게 설명해 주시기 바란다.
우선 이런 상황은 당대 혹은 후대에 조선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을 지역으로 보는 근거는 이러하다.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고,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 역수가 있다."란 기록이 사기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나타난 '조선'은 문맥상 지역으로 인식하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외에 다른 명칭들은 모두 지역 명칭이다. 그러므로 조선 역시 지역 명칭으로 보는 것이 좀 더 문맥상 자연스럽다. 그리고 여기서 지명이 나열된 순서가 곧 지역이 위치된 순서가 아님을 명심하라.
조선 다음에 요동이 기록되어 있단 점을 근거로 혹자는 조선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논리대로면 다른 지명들의 순서도 그런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확인해 본 결과 연나라와 가까운 지역부터 기록했단 근거가 없다. 그런 인식은 애초부터 있지 않았다. 분명한 점은 조선은 요동 지역의 인근이란 사실이다.
조선 지역에서는 부족들이 특정한 제사장을 중심으로 결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의 성소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형태는 중원 지역만큼 비약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홍산 문화가 하가점 하층 문화로 발전하였지만 그럼에도 이 지역에는 중원 지역의 문화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국가의 형성 조건이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국가 형성 조건으로 추정되는 유적은 기원전 10세기 이후에 가야 나온다. 그 이전에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들이 미약하게 결집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선 지역의 제사장을 단군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후 이 제사장이 정치 권력으로 기능하는 시기는 국가 형성 조건이 나타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 때부터 단군에 왕검이란 칭호가 붙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 2012/03/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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