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헌과 고고학과 불일치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만 이것은 매우 어렵다.
팽이형 토기 문화권을 고조선으로 설정했지만 팽이형 토기 문화권의 후진성을 감안하지 못했던 것이 우선 실수이다. 물론 이 부분을 평안도-황해도의 중국과 교류하기 좋은 지리적 이점과 기록의 높은 정합성으로 메우려고 했지만 후진성이 너무 걸린다.
그리고 후진적인 팽이형 토기 문화권이 요동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부족하다. 그리고 정가와자 문화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단지 예맥족이라고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중국측에서는 예맥족을 주요 대외 교역 파트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가와자 문화권이 팽이형 토기 문화권보다는 선진적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동설을 지지해야 하는가?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정가와자 문화권의 형태가 BC. 4세기 이후 청천강 이남에도 나타나는가? BC. 4세기 후반에 연장 진개의 동정이 있었다. 문제는 정가와자 문화권은 중국측 조선 관련 기록과도 그렇게 정합성이 없단 사실이다. 분명히 BC. 4세기 후반은 조선이 약세를 보이지 않는가?그런데 비슷한 시기의 정가와자 문화권은 강세를 보인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나? (강세는 아니었다.)
그리고 정가와자 문화권과 연화보-세죽리 문화권의 관계는? 이 부분의 고고학 자료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
우선적으로 내가 올린 포스팅에서 팽이형 토기 문화권으로 비정한 것은 기록과의 높은 정합성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보류할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정가와자 문화권을 조선으로? 그렇게 보기도 어렵겠다. 기록의 정합성이 너무나도 떨어진다.
그러나 일단 내가 올린 글에서 일단 계속적으로 견지할 부분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단군 전승의 주요 중심지는 평안도-황해도이다.
2. 진개의 침략 대상은 조선만이 아니다. 진번도 포함된다. 이것은 위략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2천리 부분은 조선만 해당한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어쩌면 2천리는 '요동 동편 2천리'와 같이 동방을 가리키는 수식어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조선만이 선(先)삼국시대의 대표가 아니다. 그런 시기는 위만 때부터이다.
4. 선(先)위만 시대의 조선은 춘추 시대 중반부터 제후국, 왕국 규모였을 것이다.
5. 선(先)위만 시대의 조선은 발(發), 진번(眞番), 기타 예맥 계열 집단과 함께 병존했을 것이다.
6. 이동설은 우선 검토해보겠다.
팽이형 토기 문화권을 고조선으로 설정했지만 팽이형 토기 문화권의 후진성을 감안하지 못했던 것이 우선 실수이다. 물론 이 부분을 평안도-황해도의 중국과 교류하기 좋은 지리적 이점과 기록의 높은 정합성으로 메우려고 했지만 후진성이 너무 걸린다.
그리고 후진적인 팽이형 토기 문화권이 요동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부족하다. 그리고 정가와자 문화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단지 예맥족이라고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중국측에서는 예맥족을 주요 대외 교역 파트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가와자 문화권이 팽이형 토기 문화권보다는 선진적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동설을 지지해야 하는가?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정가와자 문화권의 형태가 BC. 4세기 이후 청천강 이남에도 나타나는가? BC. 4세기 후반에 연장 진개의 동정이 있었다. 문제는 정가와자 문화권은 중국측 조선 관련 기록과도 그렇게 정합성이 없단 사실이다. 분명히 BC. 4세기 후반은 조선이 약세를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정가와자 문화권과 연화보-세죽리 문화권의 관계는? 이 부분의 고고학 자료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
우선적으로 내가 올린 포스팅에서 팽이형 토기 문화권으로 비정한 것은 기록과의 높은 정합성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보류할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정가와자 문화권을 조선으로? 그렇게 보기도 어렵겠다. 기록의 정합성이 너무나도 떨어진다.
그러나 일단 내가 올린 글에서 일단 계속적으로 견지할 부분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단군 전승의 주요 중심지는 평안도-황해도이다.
2. 진개의 침략 대상은 조선만이 아니다. 진번도 포함된다. 이것은 위략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2천리 부분은 조선만 해당한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어쩌면 2천리는 '요동 동편 2천리'와 같이 동방을 가리키는 수식어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조선만이 선(先)삼국시대의 대표가 아니다. 그런 시기는 위만 때부터이다.
4. 선(先)위만 시대의 조선은 춘추 시대 중반부터 제후국, 왕국 규모였을 것이다.
5. 선(先)위만 시대의 조선은 발(發), 진번(眞番), 기타 예맥 계열 집단과 함께 병존했을 것이다.
6. 이동설은 우선 검토해보겠다.
덧글
진개의 침략이 연나라 소왕 때이니 기원전 4세기말~3세기초가 되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3세기초(기원전 280년 전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시점 이후 요동반도와 압록강 북부 지역의 문화적 양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오강원 선생의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문화의 관계'라는 논문을 보시죠. 정가와자 유형의 중심이 거의 공중분해되고 그 주변부만 살아 남습니다. 그러니 진개 침략 이후에도 정가와자 유형이 번성했다고 하는 말씀은 현재의 연구결과와 그리 부합하지 않습니다.
2) 요동과 압록강 북부 제 유형의 상호관계
오강원 선생은 진개의 침략 이전 요동지역의 문화양상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된다고 유형을 분류하고 그걸 그림으로 그린 한국 최초의 연구자입니다. (직전 포스팅에 인용하셔서 올리신 지도도 원 출처는 오 선생의 논문에서 나온 것임)
하지만 이 같은 유형별 분류만 놓고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애당초 그런 유형 분류를 한국 학계에서 정식으로 제기한 주인공인 오 선생의 설명 중 놓쳐서는 안될 대목이 있습니다. 오 선생은 정가와자유형 문화의 전성기에 요동지역 문화양상이 몇 개의 그룹으로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역망 분석과 위세품 분석을 통해 보면 정가와자 유형을 중심지이자 상위로, 나머지 그룹을 하위로 하는 교역망의 형성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이야기합니다. 오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가와자 유형을 중심으로 재편된 요동 지역의 교섭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유사한 문화 단위를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물론 정가와자 유형의 유적 중에 뚜렷한 정치적 지배 질서의 중심점을 보여주는 유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연구결과와 문헌사학적 입장에서의 고조선을 연결하는 가설은 여전히 매우 유동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선생의 연구결과로 본다면 정가와자 유형을 상위로 하고, 나머지 유형을 하위로 하는 교역망이 성립하는 것을 볼 때 모종의 정치적 통합을 가정할 여지는 있습니다.
이런 고고학적 흐름을 본다면 중국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고조선의 위상,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도 영토의 일부를 잃었음을 긍정하는 한 기원전 4세기대까지의 정가와자 유형을 제외하고 고조선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 이동설 문제
물론 이 경우 기원전 3세기대 초반 이후 고조선의 중심지역이 이동했다고 해석할수 밖에 없고, 이 경우 그런 이동 양상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느냐는 당연한 의문이 나오죠. 그런 점에서 마에스트로님이 말씀하신 "딜레마"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도 고고학적으로 이동설을 증명할 수 없다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부담스럽고.... 어쩌면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몰락한 북한 고고학계의 낮은 연구 수준이 원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대 시대의 국가 중심지 이동이란 것이 단순한 지리적 이동일수는 없고 지배집단의 부분 교체와 일부 문화적 교체 양상을 수반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좀 더 정밀한 고고학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지금 북한 학계의 질적 수준으로는 이런 연구를 기대하기 힘드니 상황 변화를 기대해야겠지요. 해석은 둘째치고 제대로된 발굴보고서라도 나오면 한국 학자들이 그걸 토대로 연구할 수 있겠지만 북한 고고학계는 그 수준도 아니어서...
그리고 여러가지 요소를 볼 때 한반도 서북부가 고조선 최후기 중심지 후보로서 1순위인 것은 사실이지만, 압록강 북부의 대전자 유형도 기원전 3세기 이후의 모종의 정치적 중심점 중에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어서 앞으로 좀 더 정밀한 검토를 하다보면 완전히 다른 그림이 그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주로 참고한 것은 송호정 교수의 논문들이었고 요동지역에 관한 것은 매우 소수입니다. 또한 정가와자 부분은 제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다시 검토해야겠군요.
감상태 선생의 책만 봐도 얘가 얼마나 엉터리에 황당한 얘인지를 쉽게 확인하실텐데, 왜 자꾸 이런 애의 황당한 논리를 가지고.
마에스트로님이 궁금해하시는 분야라면 일단 오강원 선생의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인 "비파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전개과정연구"를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고
기원전 3세기대 진개의 침략 이후 요동지역에서 중세형동검이나 연나라풍 초기 철기 유물이 뒤섞여서 출토되는 유적(과거에 거칠게 연화보-세죽리 유형이라고 지칭하는 문화와 관련 있음)을 어떻게 세분화하고,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는 역시 오선생이 상고사학보에 게재한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형과 연문화의 관계'라는 논문을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아래 복기대 선생 논문도 나름 시사점은 있는 논문이지만, 기원전 4세기때까지 다루면서 문헌사학계에 일반적으로 기원전 280년 전후(기원전 3세기 초)로 추정하는 진개의 침략 이후 고고학적 변화 양상을 어떻게 다루겠다는 것인지 의문점이 남지요.
복기대님의 논문인 "기원전 7~4세기 요서지역의 정치적 변화에 관하여- 진개 동정을 중심으로 -"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실제로 기원전 24세기에 아카드엔 사르곤 대왕이 있었고.
꼭 개그라고 볼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