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빡침을 줄 수 있는 포스팅일 수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란다. 조금 욱하시더라도 뒷골을 단단히 부여잡으시기를. 그리고 여기에 있는 글은 어느 정도 필자의 주관이 있을 수 있다. 근거 없는 비난은 하지 마라. 솔직히 욕을 각오하고 쓴 글이긴 하다. 그러나 욕을 하더라도 좀 제대로 읽고 욕을 하라. 분명히 알 것은 필자는 절대로 일빠가 아니며 애국자임을 밝혀둔다.
<본문>
백제 아화왕 때 태자 직지가 왜로 인질로 간 적이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도 남아 있는 것과 당시 백제가 고구려(장수왕 이전의 국호는 이렇게 쓰도록 하겠다)에게 처참히 처발리던 상황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당시 직지가 왜에 있었던 기간과 백제의 거물급 인사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직지와 왜 조정 간의 관계는 긴밀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아화 역시 왜의 도움을 받아 찬탈자인 진사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특히, 아화가 왕이 되는데 있어 왜 조정의 인사들의 도움이 컸다. 이렇게 되면 왜와 백제의 관계는 상당히 긴밀하게 된다. 왜의 입장에서도 "우리가 당신네 왕을 세우는데 어느 정도 일조했으니 그만큼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게다가 백제 아화왕 때는 고구려와 대방 전역을 두고 싸움이 매우 치열했다. 그러나 백제는 매번 패배했고 국력도 예전같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강 북부 일부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방 영역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왕제(부여홍일 가능성이 있다)와 주요 대신 10명(당시 아화왕의 측근 인사 행태를 보면 진씨나 사씨일 가능성이 있다)이 고구려에 인질로 끌려갔다.
그런데 아화왕이 즉위했을 때 왜의 군대를 빌렸던 점을 감안하면 아화왕은 백제 정계에서 크게 입지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할아버지, 아버지 때부터의 외척 세력인 진씨와 주요 파트너였던 사씨에 의존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패배로 인해 이들에게도 크게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결국, 아화왕은 태자를 왜에 인질로 보내 왜의 군대를 끌고와 대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타이밍도 기가 막힌 것이 그 때는 고구려가 한참 후연을 털고 있던 상황이다. 결국에 빡칠대로 빡친 고구려 군대에 의해 왜군들은 한마리도 남기지 않고 끔살당했다. 거듭된 패전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아화왕은 그 전쟁이 있은지 얼마 안지나서 죽고 만다.
더 웃기는 것은 아화왕 때 너무 오랜 전쟁으로 인해 403년 궁월군이 120현민을 이끌고 왜로 건너간 일이다. 공교롭게도 그 해 2월 봄에 왜의 사신이 아화왕을 알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화왕은 왜의 사신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아마 이 때를 계기로 궁월군이 집단으로 망명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후에 태자 직지는 왜왕으로부터 정병 100인의 호송을 받으면서 백제로 귀환한다. 문제는 당시 직지를 환영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혈례가 형 훈해를 죽이고 왕이 된 사태이다. 그러나 이 반란도 해씨 가문의 도움을 받아 정리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이다.
당시 직지왕의 주변 인사들은 해씨와 왜인들이다. 직지왕의 비(妃)인 팔수 부인은 진씨, 해씨, 또는 왜인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해씨라고 본다. 그것은 일본서기에 팔수 부인이 왜인이란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해씨 집안이 외척 집안이 되어 한바탕 백제 정계를 휩쓰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직지왕이 왕이 되는데 있어 도움을 준 왜도 직지왕의 파트너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아화왕도 그렇듯 직지왕도 왕이 되는데 있어 왜의 도움을 받았단 것이다. 게다가 팔수부인도 왜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직지왕이 죽은 후 구이신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팔수부인은 목만치와 사통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팔수부인은 목씨들을 대량으로 정계에 끌어들이게 된다. 게다가 목만치는 왜와 연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해 보건대 목만치는 어느 정도 왜인들과 정서적으로 통했던 것 같다.
이러니 목만치가 해씨들의 견제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적인 사고를 가진 어느 한국 사람이 낙하산 인사로 중용이 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토종'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냥 비오는 날 먼지가 나듯이 패죽이고 싶을 것이다.
필자가 추측해 보건대 아화왕 때부터 구이신까지는 왜가 어느 정도 백제 정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을 것이다. 2대가 왜의 영향으로 왕이 되었다. 이 경우 왜가 백제 정계에 대해 간섭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구이신왕 때의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냥 즉위했다가 7~8년만에 죽었다는 얘기만 있다.
전체적인 정황을 볼 때 이 시기의 백제왕들은 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물론 문화적, 군사적으로는 백제가 왜보다 앞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왕가가 왜 조정과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경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더군다나 외척 세력이 왜와 연관되거나 왕이 즉위할 때 왜의 도움을 받은 경우라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물론 이것은 국가적으로 왜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백제 정계의 권력 다툼에서 왜 조정의 영향이 어느 정도는 미치고 있었단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자가 추측해 보건대 산상왕의 형 발기가 공손도에게 군사를 요청함으로써 고구려로 쳐들어 온 상황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패하면 발기의 꼴이 나는 것이지만 성공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경우 왜 조정의 영향력이 백제에 미치게 된다. 그 단초는 아화왕이 마련했다.
다시 말하자면 왜 조정이 백제 조정에 영향력을 미치던 기간은 아화왕 때부터 구이신왕 때까지로 보인다. 구이신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적은 반면,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기>를 통해 구이신왕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목만치는 이후 왜로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구이신왕에서 비유왕으로 왕위 교체될 때 백제에 정변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백제왕이 왜 조정의 도움으로 왕이 된 경우도 있다. 바로 동성왕이 그 케이스이다.
이를 보면 백제와 왜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긴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찬성씨록을 보면 백제 성씨들이 많이 등재되어 있는데 백제왕을 시조로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궁월군 사태를 보더라도 백제에서 왜로 건너가는 귀족들도 많았을 것이고 왜 조정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왜 조정의 힘을 입고 백제 조정에 간섭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런 사실들을 참작한다면 왜 무왕이 나중에 송나라에 스스로를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한 것도 아주 근거없지는 않을 듯하다(물론 이 호칭이 어디까지나 자뻑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결론적으로 정쟁의 측면에서 볼 때, 백제와 왜의 관계에서 한 때 왜가 백제보다 앞선 때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백제 정계의 혼란으로 빚어진 사태였다.
보주:
1. 사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왜는 매우 특이하다. 신라와 왜는 확실히 적대국인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일본서기나 삼국사기만해도 신라와 왜는 둘 중 하나는 꼭 죽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초창기만 해도 신라 정계에 왜인이 진출한 사례도 있다. 호공이 그런 예이다.
2. 아화왕이 응신천황 8년(397년)에 왜에 무례하여 응신이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 지지의 5개의 땅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때 직지가 왜에 인질로 간다. 그런데 응신이 빼앗았다는 얘기는 믿을 수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지역이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여 독자 노선을 걸었던 것 같다. 침미다례는 '동이마한의 신미제국 20국'으로 생각되며 오늘날 전남 지역으로 보인다.
침미다례는 이후 고구려에 독자적으로 조공을 바칠 정도로 독자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구려 문자명왕 13년(504) 이전에 백제에 점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유왕 때에 백제는 나제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는데 이 시기에 침미다례가 백제에 넘어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근개루왕 때 잠시 백제가 강력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구려의 재침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 혼란기에 접어든다.
3. 동한지지의 경우 직지가 왜에서 백제로 귀환할 때 왜 조정이 준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 필자는 이를 미야케[屯倉·屯家]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는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미야케란 야마토 조정에 소속된 직할지라고 한다. 즉, 영토는 아니고 왜왕 개인 소유의 영지인 것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일본무존(야마토다케루)이나 왜왕이 미야케를 개척하는 내용이 나온다.
어쩌면 한반도에도 왜왕 개인 소유의 영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을까? 필자는 도래인 출신의 왜왕이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그 도래인이 한반도 남부 사람인 경우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한반도에 본거지를 두고 왜로 넘어간 경우도 있을 것이라 본다. 아무리 대가족 사회라도 모든 일가친척들이 도왜했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왕이 되거나 왜의 실력자가 되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한반도에 미야케란 명목으로 경영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4. 도대체 궁월군 이놈은 누군가? 120현의 백성들의 규모도 만만치 않게 큰데 이 정도 규모의 백성들을 왜로 보내는 것이 가능한가? 게다가 현의 규모는 어느 정도? 문제는 백제가 현이란 단위를 쓰기나 했나? 추측을 하면 끝도 없겠지만 일단 필자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궁월군이 집단 망명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한다.
p.s. 역시 백제사는 미궁에 빠져 있군........ 왜. 도대체 넌 누구냐? 삼한사를 안다면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단 말이냐.....ㅠㅠ
덧글
어쩌면 백제가 한 짓거리에 비하면 신라는 양반이었을지도. 솔직히 이건 두고두고 까여야 할 문제는 아닐지....... 아무리 얘네들이 백제 정계에서 영향력이 없다고 해도 이런 짓까지는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백제의 호남지역 장악력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인가요?
한성 지역에 비해 전남 지역의 다수의 섬들과 해안 지역의 지배력이 공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백제 시대에도 동일하게 관찰되는 것 같습니다만?
고대사에서 국경선을 그려놓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선 개념하고는 좀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지나가다가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태자를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야말로 백제-왜 관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화왕이 왜국에 태자를 보내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때는 아화왕은 진사왕꼴이 되는 것입니다.
397년에 아화왕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삼촌인 진사왕이 했던 일을 똑같이 하였습니다. 일본서기는 다음처럼 이야기합니다. "아화가 왕이 되어(아화왕립) 귀국에 무례하였다."
아니 아화왕이 왕이 된지가 벌써 몇년째인데 아화왕이 섰다니.... 일본서기 엉터리네... 흐흐흐.... 일본서기가 맞는 것입니다. 이 해에 아화왕이 섰습니다. 진사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응신 3년조를 보면 진사왕 8년인 이 해에 '진사왕립'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 죽지.
그러면 안 죽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바로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에 나옵니다. *근초고왕 26년: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바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여구'로부터입니다. 근초고왕은 부여씨가 아닙니다. 부여씨는 응신, 인덕, ... 이들이 부여씨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고 다른 한편으로는 틀립니다.
4세기 전남지역은 한성에 도읍한 근초고왕이 통치하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근초고왕은 해씨입니다. 부여씨란 전남지역에서 옹관묘를 쌓던 사람들의 성씨입니다. 사서를 잘 보아야 합니다. 어디를 보아야 하느냐가 실력입니다.
백제권에서 3세기부터 6세기까지 가장 거대한 고분군이 축조된 지역이 전남지역인 영산강유역입니다. 부여씨는 이들의 성씨였습니다. 즉 마한의 성씨가 부여씨입니다. 최치원의 마한 즉 고구려는 맞는 말입니다.